나에게, 그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었던 산소망…
김 나 연
입추가 지났는데도 계속되는 폭염 속에 지쳐가던 8월, 나는 경기도 포천으로 떠났다. 우리 학교뿐 만 아니라 숭의여고, 숭실고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봉사활동이다 보니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숙소와 예배당 주변은 금세 북적거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두려웠던 나와 달리 회원분들께 친절하게 다가가는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괜히 쑥스럽고 어색했던 것이 바로 산소망 회원분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한시간 쯤 지났을까. 개회예배를 마치고, 나와 1박 2일간 함께 하실 짝꿍을 만나는 시간이 다가왔다. 도봉, 노원, 성남, 분당 등등. 전국 각지에서 오신 회원분들. 우리 학생들에게뿐만 아니라 1년에 딱 한 번 여름 신앙수련회인 만큼, 그분들에게 역시 소중하게 기억될 추억이자 1년간 기다려 온 간절함이라는 걸 알았기에 나 역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나의 짝꿍이 되신 회원님은 여든이 조금 넘으신 할머니셨다. 그저 붐비는 이 예배당을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비록 첫 만남은 정신이 없이 지나갔지만, 숙소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서울에 계신 외할머니의 생각에 가슴이 찡했다. 새하얀 머리에, 아무렇지 않은 듯 움직이고 있는 눈동자. 하지만, 할머니께선 조금의 불빛도 보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른쪽 귀에 꽂혀있던 조그마한 보청기. 할머니께선 내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으셨다. 한 글자 한 글자 손바닥에 써 내려가니 그제야 “아~ 김나연!”하고 소리치셨다. 그리곤 “내가 눈도 어두운데 귀까지 안 들려서 미안해.”라고 발그레 웃으시며 말을 덧붙이셨다.
‘중도 실명자’. 어떻게 보면 그 분들에겐 잘 못이 없다. 수련회에 참석하신 200여 명의 회원분들께서도 각자 서로 다른 가슴이 메어오는 사연들이 가득할 것이다. 또, 실명의 정도와 합병증도 매우 다양했다. 비록 나는 그 속에 얽힌 사연들을 보고 들을 수 없었지만, 이미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미 오랜 세월 세상을 보아오신 분들이기에 지금 이 순간 이 칠흑 같은 어둠은 회원분들의 가슴속 깊이 한으로 맺혀있을 테니까. 그 평생의 사무치는 한이 나에게도 전해졌고, 그래도 이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신다는 사실에 난 그저 감사했다.
나는 사실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수련회를 통해 배운 것이 바로 신앙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실명의 아픔을 ‘믿음’으로 견뎌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 계속되는 목청껏 소리치는 ‘아멘’. 그동안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던 그 말이, 그들에게는 간절한 마지막 구원의 외침이었음을. 난 미처 알지 못 했다.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게 도와주십쇼.’
‘건강하게 살 수 있게 인도해주십쇼.’
그렇게 예배당을 꽉 채웠던 이들의 울부짖음. 난 그 속에서 희망을 느꼈다. 간절함이 우러나왔던 희망. 아무런 의욕 없이 틀에 박힌 채 살아가던 나에게 따가운 채찍질과 같았던…. 난 느꼈다. 이렇게 밝은 세상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판에 놓인 반찬의 위치조차 알 수가 없어 아무런 맛도 멋도 없이 입으로 무작정 넣어야 했던 맛없는 밥이지만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손 붙잡고 인사하시던 그 모습. 이렇게 다 늙은이 도와줘서, 이렇게 맑은 바깥공기를 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흥얼거리시던 그 모습. 하지만,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의 100분의 1의 고통 속에서도 힘들다며 포기하던 나의 그 어리석은 모습. 그렇게 어리석고 어렸던 나는, 그 속에서 감사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했다. 감사했다. 또 감사했다.
그동안 우린 인생을 살면서 너무 편안했기에, 너무 행복했기에 잊고 산 것들이 많았다. 나 역시 인생을 시작하는 기로에 선 지금. 이 모든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음에 행복했다. 비록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200여 명의 산 소망 식구들이 외치는 말은 딱 한 마디였다.
“감사합니다.”